미희 2부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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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해 흔들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박선호 앞에서 허둥대는 꼴을 보여서 만족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은 빠르게 굳어 갔다.
이미 예전에 박차고 나온 자리인데, 나는 진작에 지헌에게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 마음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내가 1순위가 아닌 정지헌은 이상했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이 무슨 의미인지 들여다보기도 두려웠다.
“나도 이만 가 볼게.”
도망치듯이 딱딱한 얼굴로 돌아설 때였다.
“너희는 볼 때마다 분위기가 좋다?”
빈정거리는 지헌의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들었다.
“뭐?”
귀를 의심하며 박선호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설마 지금… 쟤랑 나 말하는 거야?”
“쟤? 말이 편하네.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지셨나.”
이상한 포인트에서 걸고넘어지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너 눈이 삐었어? 누구랑 누굴 갖다 붙이는 거야.”
대뜸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람들이 안 볼 때마다 도끼눈 뜨고 뒤에서 갈구는 통에 안 그래도 없는 인내심을 동원해 꾹꾹 눌러 참고 있는데, 어디를 봐서 박선호하고 분위기가 좋다는 건지. 같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의 절친한 친구에게 견제당하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 거다.
“쟤 나 볼 때마다 갈구는 거 안 보여?”
지헌은 쟤, 쟤, 거리는 말이 어지간히 귀에 거슬린 듯 서늘한 표정을 풀지 못하더니, 이어지는 내 말에 미간을 확 구겼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둘이서 뭐 있는 거 아냐? 유별나게 사이가 좋은 건 너희잖아.”
“뭐?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헌은 구정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팍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빈정거렸다.
“너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다가 홱 등을 돌렸다.
자꾸 헛소리나 하는 지헌에게 짜증이 났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삐끗하고 말이 튀어 나가는 나에게도 화가 났다.
이후 시간은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헌에게 첨삭받은 조서를 작성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어쩐지 대학 때로 돌아간 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때도 지헌은 내게 무리한 목표를 제시했고 나는 그걸 달성하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시간이 흘러도 어긋나고 같은 역할로만 마주 보는 관계. 거기에 일종의 무력감도 느껴졌다.
우리는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우울했다.
저녁은 간단히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퇴근 무렵이라 엘리베이터 앞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발걸음이 저절로 비상구로 향했다.
박선호를 만나면 피곤하기도 하고, 오래전 일이지만 워낙 학교에서 떠들썩했던 사건이라 혹시 기억하고 있는 지인을 만날까 일말의 두려움도 있었다. 어쨌든 그 사건은 나에게도 상처로 남아 있다.
계단 중간쯤 올라갈 때, 위층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돈 보내 드린 건 받으셨죠?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 가세요. 저 그 정도 해 드릴 여유는 있어요. 저 이제 들어가 봐야 돼요. 네, 또 전화할게요.”
통화를 끝낸 여자는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통화로도 대강의 사정이 짐작되었다. 이어서 쾅,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나는 잠시 서 있다가 마저 계단을 올라갔다.
데스크 앞에 선 여자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여자를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여자는 가방을 챙기다가 무심코 나를 발견하고 애매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에요.”
고개를 젓고 여자를 지나쳤다.
혹시 정지헌은 형편이 어려운 여자에게만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건가. 불쑥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쩐지 대학 때도 이상할 정도로 호구처럼 잘해 준다 싶더니.
Rrr.
지헌의 내선 번호였다. 너무 빨리 받아서 나의 조급증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않게. 정확히 네 번 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예전에는 아무 의식 없이 하던 사소한 행동들도 지금은 상대를 의식하면서 계산적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이러든 저러든 지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게 사람을 초라하게 했다.
“여보세요?”
“조서 끝났으면 들고 와.”
지헌은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꺼냈다. 시계를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새워도 어려울 것 같은데.”
“야근할 거지?”
“그래야지.”
“그럼 와서 초밥 가져가.”
“뭐?”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냐.”
“…….”
“먹었어?”
“…아니.”
책상 위에 있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샌드위치를 바라보았다.
“안 먹었어.”
대답하면서 샌드위치를 집어 발밑 쓰레기통에 툭 던졌다.
일하는 도중인지 수화기 너머 차락, 하고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수화기를 바꿔 들어서 감이 조금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저녁 안 먹었으면 와서 초밥 가져가. 사무장님이 사 오셨어. 또 군것질로 때우지 말고.”
“밥 먹고 더 열심히 야근하라는 거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습관처럼 재킷을 입다가 다시 벗고, 사무실을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거울 앞에 섰다.
문득 지헌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 스타일을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지헌이 머리 묶어 달라고 하면 풀고 바지 입으라고 하면 치마 입고 청개구리처럼 굴었지만, 나중에는 지헌이 일부러 반대로 말하며 나를 조종한다는 걸 깨달았다. 알면서도 속아 주었다.
묶은 머리카락을 풀고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내렸다. 종일 일하느라 구겨진 옷도 신경 쓰여서 손으로 최대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똑똑.
복도를 지나 지헌의 사무실을 두드리자 대답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지헌은 휴대 전화를 한쪽 어깨에 끼운 채 통화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마호가니 탁자 위에는 일식집 이름이 적힌 쇼핑백이 있었다. 대학 때 지헌과 즐겨 먹던 가게였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지헌과 헤어지고 오히려 나는 묘한 죄책감에 같이 찾던 음식점을 한 번도 못 갔는데 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갔구나, 싶어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저희 쪽에서 검토해 본 바로는 소송 없이 가처분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지헌은 통화하면서 서류 더미로 어수선한 책상을 뒤적였다.
막 외출하려는 모양인지 새로 손본 듯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단장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 박선호가 내 앞에서 들으란 듯이 의원 따님 약속 운운한 말이 떠올랐다.
“어디 가?”
전화를 끊은 지헌에게 넌지시 물었다.
“일찍 퇴근하네. 어디 모임 있나 봐?”
슬쩍 떠보는 질문에도 묵묵부답이다.
지헌은 말없이 재킷을 걸쳐 입고 창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커프스단추를 채웠다. 이어서 타이 매듭을 조이고 쭉 서 있는 핏이 꽤 멋있었다. 예전에도 잘생겼다는 건 알았지만 세월의 무게감이 더해져서 분위기가 근사했다.
그런데 살짝 마른 듯 날카로운 옆모습이 내 눈에는 왜 쓸쓸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고집스레 나를 외면하는 시선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 봤자 나보다 백 배는 더 잘사는 놈인데.
예전에 호구 같은 지헌이 하도 답답해서 나는 내버려 두고 네 인생이나 챙기라고 하면, 지헌은 너만 속 안 썩이면 난 걱정할 일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치열했던 시절, 지헌은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을 내게 주었다. 헤어지고 가끔 그게 그리울 때가 있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그대로 더 있다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다. 들고 왔던 서류를 내밀었다.
“토지 보상 관련 판례 말인데 법원에 제출해도 될까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서….”
“나중에.”
지헌은 말을 끊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지헌의 앞길을 막았다.
“지금 알려 줘.”
“…….”
지헌은 고집부리는 나를 일별하고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그러곤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대로 지헌을 보내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느낌. 알 수 없는 절박감이 등 뒤에서 나를 떠밀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우뚝 멈춰 선 지헌은 무슨 짓이냐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호기롭게 막아서긴 했는데 머릿속이 하얬다.
“…….”
지헌을 노려보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내 손은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톡, 톡. 단추가 풀리고 부풀어 오른 가슴 둔덕과 하얀색 레이스가 노출되었다.
“하.”
지헌의 어처구니없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헌보다 더 놀란 사람이 바로 나였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고, 속으로 황망한 비명을 질렀다.
그 어설픈 쇼를 지헌은 감흥 없는 얼굴로 감상했다. 차가운 시선에, 동요 없는 얼굴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
사람이 이렇게 바닥을 드러내는구나. 유치하고 얕은 수였다. 그래도 속아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라도 지헌의 마음을 내게 돌리고 싶었다. 몸은 잘 맞는 편이니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서로 어리석었지만 지금 시작하면 다른 결론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나 좋을 대로 대책 없이 생각했다.
그런데 지헌의 서늘한 얼굴을 마주하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객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엎어 버린 물을 도로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싸구려 감상을 마치고 지헌이 물었다. 내가 나한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너 지금 어쩌자고 이러는 거니. 사무실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내가 제정신인가 싶다.
다른 여자 만나러 가는 지헌을 보면서 내가 배신감을 느낄 자격이 있을까.
내가 지헌을 어떻게 버렸는데. 정지헌 가슴에 어떻게 칼을 꽂았는데.
소개팅 나가는 지헌을 보는데 머리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마음이 참담했다. 지금 와서 정지헌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내가 정상인가 아닌가, 그 판단조차 흐려질 지경이다.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답을 구하듯 지헌을 보았다.
지헌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나를 보더니 책상으로 걸어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툭툭, 손목의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쭉 빼 당겼다. 그 거침없는 동작이 사람을 긴장시켰다.
몸을 날리던 아까의 객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 미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지헌은 고개를 돌려 눈빛으로 나를 낚아챘다.
나는 지헌을 경계하며 등 뒤로 손잡이를 더듬어 퇴로를 확보했다. 민낯을 보일 때의 정지헌은 항상 위험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생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왜, 도망가게?”
시계를 툭, 책상 위에 던지며 지헌이 비웃었다. 강압적으로 나를 어쩌려는 건 아닌 듯했다. 해칠 의도가 없다는 듯 느긋이 의자에 앉아서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 정도는 제압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나는 우리 사이의 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소파를 방패 삼아 지헌을 경계하듯 쳐다보았다.
“나랑 놀자며?”
지헌이 비스듬히 웃었다. 뭔가 속내를 알 수 없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미소였고,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라는 머릿속 명령과 달리 다리는 주춤주춤 지헌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잔뜩 경계하면서 다가서는 내 모습에 지헌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웃는 것도 사악해 보였다. 어쩐지 알면서 속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나갈 용기도 없으면서.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고, 다리를 꼬고 앉은 지헌의 구두 끝이 스커트 자락에 닿았다.
“더 벗어 봐, 어디.”
“여기서?”
“그래. 여기서.”
지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
고민은 짧았다. 치마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툭, 하고 바닥에 치마가 떨어져 웅덩이지자 옆으로 한 걸음 벗어났다.
크림색 블라우스 아래로 얇은 검은색 스타킹 밴드 라인이 아슬하게 드러났다.
이어서 허리를 굽혀 팬티스타킹을 벗어 내리고 블라우스를 벗어 치마 위로 던졌다.
아래에서 받쳐 주는 브래지어 덕분에 탐스럽게 솟아오른 젖무덤은 눈부시게 하얬다.
“마지막은 네가 벗길래, 내가 벗을까. ”
지헌을 보았다.
“계속해.”
지헌이 명령했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브래지어 호크를 풀고 허리를 굽혀 팬티를 끌어 내렸다. 아래로 출렁이는 가슴에 지헌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아침까지 회의하고, 의뢰인과 직원들이 들락거리는 사무적인 공간에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은 이상했다. 공간 자체가 사람을 긴장시키고 야릇하게 만들었다. 별다른 애무 없이 사람을 달아오르게 했다.
항상 지헌을 미친놈이라고 욕했는데 정말 미친 건 나인 것 같았다.
지헌의 시선은 부드러우면서 탄력 있게 솟아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그 아래 타원형으로 퍼진 골반을 차례로 훑어 내렸다. 그 시선에 숨이 가쁘고 몸 안에 열기가 고인다.
지헌은 눈빛을 내게 박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내게 어떠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큼직한 손아귀에 굵직하게 일어선 성기를 쥐고 느릿느릿 쓰다듬을 뿐이었다.
나를 보며 흥분하는 지헌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지헌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내 알몸을 끈덕지게 핥듯이 보았다. 갖고 싶어 안달 난 시선. 그게 나를 충동질했다.
“…….”
나는 홀린 듯 지헌의 앞으로 걸어가 다리 사이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그러곤 눈을 감고 입을 벌려 지헌의 성기를 머금었다.
완전한 나의 패배였다. 또다시 인생이 꼬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내가 대책도 없고 답도 없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오래전 지헌과 같이 밤을 보낼 때, 그리고 가출 후 지헌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처럼 나는 가끔 막다른 길에 몰리면 충동적으로 전혀 엉뚱한 패를 집어 들었다. 될 대로 돼라, 자신을 놔 버리는 것이다.
지헌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했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헌의 성기는 내 기억보다 훨씬 더 크고 굵고 단단했다. 기다란 성기를 끈적하게 핥아 올리고 그 끝을 입에 물고 빨았다. 성기는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혀로 갈라진 끝을 질척하게 문지르자 끈적한 액체가 스며 나왔다.
그런데 체취가 전혀 역하지 않았다. 냄새가 역하지 않으면 운명의 상대라던가, 누군가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참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처음 지헌과 밤을 보낼 때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별안간 지헌의 손이 내 뒤통수를 콱 틀어잡고 가랑이 사이로 바짝 밀어붙였다.
“으읏… 읍.”
순간 목구멍 깊숙이 밀려드는 살 기둥에 지헌의 다리를 붙잡으며 목뒤에 힘을 주었다. 지헌은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약간 여유를 두며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네가 자진해서 내 좆을 다 물고.”
구역질이 올라와 빨개진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바짝 세운 성기가 젖은 점막을 문지르며 입 안을 헤집었다. 부풀어 오른 성기는 더욱 크게 펄떡거렸다.
양아치 같은 새끼.
입 안 가득 들어온 살덩이 때문에 입 밖에 내뱉진 못했다. 대신 지헌의 허벅지를 꽉 아프도록 꼬집었다. 거기에 자극받은 듯 지헌의 하체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후으.”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쾌락에 빠져드는 모습이 꽤 섹시했다. 내 목덜미를 움켜잡은 손에도 푸릇한 힘줄이 돋았다.
냉철한 변호사의 가면을 벗은 지헌의 민낯이었다. 사람들 앞에서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 그게 나를 고무시켰다.
혀로 지헌의 성기를 질척하게 문지르고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끝을 강하게 빨았다.
머리를 움켜쥔 지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소리도 더욱 거칠어졌다. 지헌은 사정할 기세로 허리를 크게 들썩이더니 팟, 하고 걸쭉한 정액을 내 입에 토해 냈다.
“컥… 흡.”
울컥 밀려 들어오는 정액을 바닥에 뱉었다.
“하아… 하아.”
벌어진 입으로 가쁜 숨과 끈적이는 점액질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지헌이 왜 내 입 속에 성기를 쑤셔 넣었는지 잘 알고 있다. 예전에는 굴욕적인 느낌에 자주 해 주지 않은 체위였다.
그나마 지헌과 동거하면서 아쉬운 게 있을 때만 마지못해 하는 흉내만 낼 뿐이었다.
지헌은 일부러 내 기를 꺾고 내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내 입에 성기를 쑤셔 넣은 것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 받아 주었다.
“…….”
거친 숨을 헐떡이며 붉게 젖은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턱을 지나 우윳빛 가슴 위로 점액질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거기에 끌리듯 지헌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내 턱을 틀어쥐고 단단한 시선과 마주했다.
“…….”
지헌의 눈빛에는 동정과 의미를 알 수 없는 회한이 스쳐 갔다.
“예전에 네가 나한테 이랬으면 난 네 발이라도 핥았을 거야. 너에게 영혼이라도 갖다 바쳤겠지. 그때 내가 원하는 건 너 하나였거든. 오직 너 하나만 갖고 싶었어. 살면서 그렇게 무언가를 염원해 본 적이 없었어.”
지헌의 고해 성사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근데, 지금은 다 시시하다.”
“…….”
“네가 정말 불쌍해 보여. 이제 진짜 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하얗게 질려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지헌은 온갖 번민이 가라앉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급히 지헌의 옷자락을 잡았다.
“…….”
우뚝 멈춰 선 지헌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시선에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움켜쥔 옷자락을 놓았다.
지헌은 책상에서 서류를 들어 툭, 내 앞에 던졌다. 지헌이 작성한 변론 조서였다.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지헌을 보았다.
지헌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많이 익숙했다. 대학 때 나는 늘 저렇게 심란하고 복잡한 눈으로 지헌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겠다. 저런 눈빛이 얼마나 사람을 서운하고 참담하고 초라하게 하는지.
“나는….”
천천히 쉰 목소리로 말문을 여는데 지헌이 내 말을 막았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너도 더는 애쓰지 마.”
그러곤 뚜벅뚜벅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홀가분하게.
***
“언제까지 보내라고 할까요?”
“…….”
“익산 토지 보상 사건, 마을 주민들 진술서요. 언제까지 보내라고 할까요?”
데스크 비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대답했다.
“…서면 경위서 보낼 때 같이 보내라고 하세요.”
“네.”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아 참, 변호사님 이것 좀 드세요.”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는 먹기 좋게 개별 포장된 파이와 마카롱이 들어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나면 가끔 감사의 의미로 선물이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클라이언트가 보낸 선물이겠거니 하고 상자를 건네받는데 비서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정지헌 변호사님께 들어온 거예요.”
나는 멈칫해서 되물었다.
“클라이언트가요?”
“아뇨. 클라이언트는 아닌 것 같은데요.”
비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른 자리에 앉은 직원이 끼어들었다.
“정지헌 변호사님 생일이라고 퀵으로 보냈더라고요. 이름 보니까 여자던데, 변호사님하고 만나시는 분이 보낸 거 아닐까요? 안 그래도 아침에 다들 난리가 났어요.”
어쩐지 요새 변호사님이 야근을 안 하시더라, 일찍 퇴근하시던데 만나는 여자분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미지의 여자를 두고 이리저리 추측했다.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상자를 도로 데스크에 내려놓았다.
“전 됐어요. 많이들 드세요.”
정지헌 생일이 가을이었나….
기억도 안 난다. 정지헌 생일은커녕 내 생일도 제대로 챙겨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헌과 헤어진 시기도 이맘때였던 것 같은데, 참 끝내주는 생일 선물을 준 셈이었다.
이렇게 과거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곤혹스럽다.
과거에 나는 인생을 타협해서 산 죄로 호되게 고생했고,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 지금은 내 발목을 잡아서 지헌에게 다가서기 힘들게 했다.
정지헌의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몇 주 전 만남을 끝으로 지헌을 보지 못했다. 비서들 말대로 연애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나도 굳이 만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날 신경 쓰지 않는 지헌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결재받을 조서가 쌓여서 더는 피할 수도 없었다.
“너 어디 가. 정지헌한테 가려고?”
지헌의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선호는 날 보자마자 얼굴을 확 찌푸리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정지헌 옆에만 접근하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데, 이제는 상대할 기운도 없다. 듣는 척도 안 하고 박선호를 피해서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이것 때문에 그래? 이리 줘. 내가 확인할게.”
박선호는 내 앞을 가로막더니 내 손에 든 파일을 득달같이 뺏어 갔다.
나는 지긋지긋한 얼굴로 박선호를 쳐다보았다. 담당 변호사인 정지헌의 사인이 필요한 서류를 자기가 가져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박선호도 서류를 보고 낭패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명 자료였네….”
“적당히 좀 합시다.”
한심하게 쳐다보며 서류를 빼 들었다.
“하여간 지금 말고 나중에 해, 나중에. 지금은 안 돼.”
박선호는 다짜고짜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박선호를 털어 냈다.
“손대지 말죠.”
“나라고 뭐 너하고 사이좋게 얼굴 마주 보고 싶은 줄 알아?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어휴, 내가 말을 말지.”
박선호는 억울해서 펄쩍 뛰다가 뒤쪽을 흘끔거리며 급히 말소리를 낮추었다.
“하여간 지금 말고 다음에 와. 이거 다 너 좋자고 하는 거야.”
어쩐지 안절부절못한 기색으로 나를 멀리 떼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평상시 정지헌을 싸고돌며 나를 구박할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뒤늦게 정지헌의 사무실로 관심을 돌렸다. 사무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박선호는 이제 사색이 된 얼굴로 내 시야를 가렸다.
“아, 뭔데 그래.”
나는 귀찮은 듯 박선호를 밀어내었다. 시선이 마주친 얼굴은 낯이 익었다. 승아 언니였다. 주제도 모르고 반갑게 웃으려다가 멈칫했다.
나를 쳐다보는 승아 언니 시선이 몹시 차가웠다. 박선호는 낭패라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언니가 정지헌 사촌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야, 너 좀 비켜 봐.”
언니는 눈빛으로 나를 낚아채며 거칠게 박선호를 밀어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는데 잘 만났다는 얼굴이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박선호는 작게 중얼거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턱을 치켜든 승아 언니는 내 앞에 섰다. 세월이 흘러도 미모와 특유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대학 때도 든든한 집안과 타고난 성격으로 남자들을 우습게 보며 손끝으로 부리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같이 공부하는 학생 입장에서 격의 없이 우리와 어울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언니가 우리 수준에 맞춰서 많이 배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아 언니는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뭐, 뺨이라도 내밀어야 하나. 언니는 나와 친분이 있긴 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정지헌 사촌인데 당연히 내게 좋은 감정일 리 없었다.
“왜, 네 발로 차 버린 정지헌 옆자리가 이제는 탐이 나?”
승아 언니는 직설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기어들어 와.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야? 아직도 지헌이한테 뜯어먹을 게 남았어? 인제 와서 아쉬워? 하긴 지헌이만큼 퍼 주고 잘해 주는 사람이 없지?”
“에이. 누나, 그만해요. 지헌이도 이제 만나는 사람 있는데 자꾸 안 좋은 과거 들춰서 뭐 해요.”
박선호가 유들유들하게 끼어들어 승아 언니를 말렸다.
평소에는 정지헌 옆에 접근도 못 하게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면서 그렇게 구박을 해 대더니, 승아 언니한테 된서리 맞으니까 나를 위해 말리는 모습이 그 와중에도 조금 우스웠다.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냐. 지헌이, 너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이야. 너 머리 굴리는 거 지헌이가 모를 줄 알았어? 아니, 걔 알면서도 너한테 퍼 준 거야. 그런 애한테 네가 어떻게 했는데? 인제 와서 뭐 어쩌자고 여길 기어들어 와. 너 정지헌 가질 자격 없어. 보물을 못 알아보고 차 버렸으니까.”
복도를 걸어오던 직원이 심상찮은 분위기에 선뜻 지나가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박선호는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승아 언니 팔을 잡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나, 진짜 그만해요. 지금 이러는 거 지헌이한테도 좋을 거 하나 없어요.”
“하여간 너 이번에도 지헌이 앞길 망치면 너 진짜 내가 가만 안 둬.”
언니는 마지막까지 악담을 퍼붓고 사라졌다. 박선호는 불시에 봉변당한 나를 보며 혀를 쯧 찼다.
“그러게 내가 나중에 오라고 했잖아.”
그러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서 탁탁 털고 내게 내밀었다.
“누나 말 안 좋게 듣지는 마라. 다 이유가 있으니까. 지헌이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연수원도 제때 못 들어가고 전과 생겨서 임용 포기하고 변호사로 빠진 거야. 누나가 말은 좀 심하게 했는데, 솔직히 그때 지헌이 몸 고생, 마음고생 하는 거 옆에서 지켜본 사람 중에 너한테 좋은 감정 가진 사람 하나 없어.”
“연수원을 늦게 들어갔어?”
“몰랐어? 걔 2년 꿇었어. 합격 기수하고 연수원 기수하고 차이 나잖아.”
“합의했다고. 그래서 나는….”
더듬더듬 잇던 말이 잦아들었다. 긴 수술 끝에 다행히 영우가 살아났고, 재판 중 합의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당연히 금방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잊어버렸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과거를 지우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고 싶었다.
“사실 쌍방 폭행이었지만 흉기를 든 지헌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긴 했어. 더구나 상대 쪽 집안도 만만치 않은 집안이라 더 운이 안 좋았지 뭐.”
“…….”
“어차피 다 지난 일 지금 와서 말해 뭐 하냐. 각자 제 갈 길 가면 되는 거지.”
박선호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려다가 망설이는 얼굴로 다시 돌아섰다.
“지헌이 요새 만나는 여자 있어. 이미 집안끼리도 인사 끝났고 곧 약혼한다더라. 너도 알아 두라고.”
툭, 손에 든 서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박선호 앞에서 우스운 꼴 보이면 안 되는데.
“…약혼?”
떨리는 음성과 눈동자에는 충격받은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박선호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얼른 마음 정리해. 이참에 이직해 주면 더 고맙고. 지헌이 결혼식에 네가 가는 것도 웃기잖아.”
아침부터 하늘이 희끄무레하더니 오후가 되면서 툭툭, 무거운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감정 평가서 나왔습니다.”
“나중에 볼게요. 거기 두세요.”
“저, 그리고 이거….”
비서는 내 눈치를 살피며 파일로 된 서류를 쓱 내밀었다. 아까 그 난리 통에 바닥에 흘리고 온 서류였다.
“…….”
기밀이 담긴 소송 서류를 아무나 주워 갈 수 있는 복도에 흘리고 다니다니, 보통 정신 나간 짓이 아니다. 그런데도 별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서류를 건네받았다. 얕은 호기심을 담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행히 신입 직원이 주웠더라고요. 아무도 안 봤어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비서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애써 나를 위로했다.
“그만 나가 보세요.”
비서의 말을 끊고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등 뒤에서 조용히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너 나중에 벌받을 거라고 승아 언니는 악담했지만, 나중까지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대학 때 지헌의 진심을 짓밟은 죄로 나는 지금 두 배, 세 배 벌받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내가 약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 신경 쓰고, 더 기다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대로변은 정차한 차들로 혼잡했고, 우산을 쓴 무리가 우르르 정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책상 위에 있는 감정 평가서와 서류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주말을 앞두고 다들 일찍 퇴근해서 복도는 한산했다.
“야, 대박. 최미희 변호사하고 정지헌 변호사 소식 들었어?”
걸음을 멈칫했다. 살짝 열린 준비실 문틈으로 직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둘이 뭐 있었어?”
“말도 마. 둘이 대학 때 완전 장난 아니었대. 학교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뜨겁게 연애했대.”
“진짜? 어쩐지. 둘이 분위기 이상하더라.”
“이상했어? 난 전혀 모르겠던데. 회의할 때 서로 대화도 잘 안 하잖아. 오히려 박선호 변호사하고 사이 별로지 않아?”
“아니야. 둘이 좀 서로 의식하는 것 같긴 했어.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진다. 대학 때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한테 심심풀이 땅콩처럼 뒷담화 주젯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진짜 오늘 일진 한번 끝내주네.”
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차이고 있었다. 준비실을 지나 내 걸음이 도달한 곳은 정지헌의 사무실이었다.
혹시 내가 정지헌에게 접근해서 지헌이 앞길을 또 망쳐 버릴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무리 때문에 낮에는 쉽게 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안에서 낮은 음성이 돌아왔다.
“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근사하게 차려입은 지헌이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었다.
“감정서 나왔어.”
“거기 둬. 나중에 읽어 볼게.”
지헌은 나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재킷을 걸쳐 입으며 자신의 모습을 창가에 비춰 보았다.
나는 안중에도 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데 온통 신경이 쏠린 모습에 심사가 뒤틀린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문을 잠갔다. 찰칵, 하는 소리에 지헌이 내게 시선을 주었다.
“뭐야?”
“네가 필요해.”
문가에 기대서서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종일 자존심이 무참히 무너졌고, 나에게 무관심한 지헌을 보면서 마음이 또다시 참담하도록 추락했다.
지헌은 창밖에 비가 오는 걸 확인하고 또 병이 도졌다는 얼굴을 했다.
“차라리 정신 병원을 가 보지 그래?”
그러곤 가방을 들고 내 옆을 스쳐 가며 비웃었다. 내 시선은 더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불현듯 독기가 치밀어 오른다.
지헌이 문을 열고 나는 말없이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발신음이 울리기 무섭게 상대방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 변호사님,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전에 승소 턱 낸다고 한 거 지금 괜찮을까요? 별일은요. 비도 오고 따듯한 와인 한잔 어떠세요? 네, 거기 호텔 라운지 괜찮아요.”
나는 온기 없는 눈빛으로 만남을 제안했다. 무시하고 나가려던 지헌은 ‘호텔’이라는 말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전 여기서 출발하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변호사님만 괜찮으시면….”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뚜벅뚜벅 내게 걸어온 지헌은 휴대 전화를 확 뺏어 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미희 씨 사무실 앞으로 갈게요. 한 20분 뒤에 사무실 앞에서.”
휴대 전화 너머 상대방은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었다.
지헌은 입매를 꾹 다물고 보란 듯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는 턱을 치켜들고 오연하게 내뱉었다.
“내가 정신 병원을 왜 가. 네가 있는데.”
지헌의 서슬 퍼런 눈빛이 나를 향한다. 마주 보는 시선에 불꽃이 튀고 나는 보란 듯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
말 없는 기 싸움 끝에 지헌이 거칠게 돌아섰다.
꽉 조인 넥타이를 쭉 빼 당겨 책상 위로 집어 던지고 잘 정리된 머리를 거칠게 헝클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발길을 돌렸는데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나를 외면한 채 숨을 몰아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나는 지헌에게 걸어가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엉덩이 아래 느껴지는 지헌의 성기는 흉흉한 얼굴만큼이나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엉덩이로 꾹 누르자 자극이 심한 듯 지헌의 턱이 움칫했다.
“나 좀 봐 봐. 응?”
고집스레 외면하는 지헌과 억지로 눈을 맞추고 딱딱하게 솟은 부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순간 지헌이 내 손을 낚아채고 날 선 시선을 보냈다.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약한 소리에도 지헌은 흔들림 없이 나를 꿰뚫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랑 뭐 하자는 건데.”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솔직한 마음이었는데 지헌은 가증스럽다는 눈빛이다. 나는 지헌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탄탄한 가슴을 손으로 나긋이 쓰다듬었다.
“진짜라니까.”
“거짓말하지 마.”
“싸우다가 드는 정이 무섭다잖아. 너랑 정들었나 봐.”
애교 섞인 음성에 지헌은 자조적인 어투로 빈정거렸다.
“싸우다 드는 정은 무슨. 떡 치다 드는 정이겠지.”
“…….”
이 새끼가 진짜. 가슴을 쓰다듬는 손이 뚝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삐딱하게 앉은 지헌을 노려보다가 후, 하고 짧게 숨을 내쉬며 지헌의 책장 앞에 섰다.
온갖 법서로 가득한 책장은 전시용이었다. 드르륵 맨 앞의 책장을 옆으로 밀자 뒤에 숨어 있던 진열장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모 기업 인사 팀장부터 온갖 고위층 인사들이 전해 준 고가의 술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 가장 화려한 병을 꺼내 거침없이 뚜껑을 뜯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찌를 듯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나는 입술을 훔치며 지헌을 향해 술병을 들어 보였다.
“술맛 좋은데?”
골프 회원권, 미술품 등등 뇌물은 다양했다. 지헌에게 전해진 뇌물 중 일부는 다시 검찰과 언론 쪽에 로비로 흘러들어 갔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한 모양인데 그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언론에서 추앙받는 변호사가 이런 지저분한 뒷거래를 한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어떨까?”
지헌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건 참을 수 없다. 애정이 아니면 미움이라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오기로 지헌을 자극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일부러 못되게 굴었다.
“적당히 하고 나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헌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 만나는 여자 있다며.”
순식간에 바뀐 화제에 지헌이 삐끗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어처구니가 없고 조금은 곤혹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어떤 여자야?”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말 좀 해 봐. 궁금해서 그래.”
“…….”
“왜, 내가 깽판 칠까 봐? 나도 체면이 있지 안 그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
“듣자 하니 의원 따님이라며? 진짜 결혼할 거야?”
연이은 도발에도 침묵하던 지헌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이제 좋은 집안에서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란 여자 한번 만나 보려고.”
내 가정 환경을 알고 일부러 나를 자극하는 말이었다. 내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라앉았다.
“그래? 네가 과연 무사히 결혼할 수 있을까.”
나는 지헌의 바지 벨트에 손을 가져다 대며 오연히 내뱉었다. 지헌은 냉랭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묵직하게 늘어진 성기를 부여잡아 우묵한 끝부분을 입에 머금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지헌은 내 뜻대로 움직였다. 나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다.
뭉툭한 살덩이는 힘을 받아서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끝부분에선 끈적끈적한 점성이 스며 나왔다. 나는 혀끝으로 갈라진 틈을 문지르며 비벼 댔다.
팽팽하게 발기하는 성기와 달리 지헌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착잡한 얼굴로 비 오는 창밖을 응시했다.
복잡한 지헌의 얼굴에는 욕망에 굴복해 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언뜻 엿보였다. 그런 고뇌하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웠다.
지헌의 성기를 잡고 뜨겁게 박동하는 살덩이를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예전에는 한사코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헌이 나를 가증스럽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춥춥, 하는 소리를 내며 혀로 길게 핥고 빨아 댔다. 사정할 듯 뜨겁게 박동하는 성기가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여서 거지 같은 기분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했다. 나에게 흔들려 무너지는 지헌이 몹시 흡족했다.
“예전엔 비 오는 날이 좋았는데 이젠 싫어. 구질구질한 기억이 떠올라서.”
지헌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몸을 앞으로 수그리며 내 턱을 잡았다. 나는 얼떨결에 입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끈적한 실이 길게 늘어지면서 턱으로 흘러내렸다.
지헌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에 묻은 액체를 쓱 닦아 주었다. 다정한 행동과 달리 이어서 묻는 말은 비수였다.
“너 예전에 나한테 구역질 난다고 했던 거 기억나?”
“…….”
“왜 대답 못 해? 선택적 기억 삭제라도 했어?”
지헌에게 했던 욕은 하도 많아서 기억도 안 난다. 과거 일을 꺼내면 나는 늘 나쁜 년일 수밖에 없었다.
식은 얼굴로 지헌의 손을 탁 치워 내고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지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비아냥거렸다.
“언제 봐도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야.”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지헌의 휴대 전화가 징징 울렸다. 아마도 지헌에게 바람맞은 여자겠지.
지헌이 책상 위로 손을 뻗을 때, 나는 급히 지헌의 목덜미에 손을 둘렀다. 그러곤 지헌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넣어 줘.”
“…….”
지헌은 휴대 전화를 손에 쥔 채 잠시 멈칫했다.
나는 사타구니를 지헌의 허벅지에 대고 앞뒤로 움직이며 허리를 흔들었다. 비죽 튀어나온 정점이 지헌의 옷에 마찰하여 짜릿했다. 허리를 들썩이며 지헌의 어깨를 부여잡고 젖은 신음을 흘렸다.
“으응… 흐읏.”
지헌의 음욕에 찬 시선이 나를 향한다. 지헌은 휴대 전화를 책상 위에 놓고 내 허리를 잡고 위로 올렸다. 그러곤 발갛게 달아오른 다리 사이로 성기를 묵직하게 밀어 넣었다.
좁은 구멍이 억지로 벌어져 그의 성기 형태로 변해 갔다. 지헌은 빠듯한 느낌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파고들었다.
“아… 흐읏. 응, 응.”
몸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헌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능숙하게 안쪽을 문질렀다.
질 안이 허리를 돌리는 그에 의해 넓혀지고 있었다. 뜨거워진 안쪽을 능숙하게 문지르고 느끼는 곳을 찌르듯이 밀어 올렸다.
“으… 응, 으읏.”
음란해진 다리 사이에서는 끈적한 액체가 연신 흘러내렸다. 물에 젖은 비누처럼 미끈거리는 다리 사이로 발기한 기둥은 가차 없이 파고들어 쐐기처럼 몸 안 깊숙이 박혔다. 뿌리까지 삼켜질 정도로 빈틈없는 결합이었다. 그러곤 민감해진 속살을 긁으며 다시 빠져나갔다.
“으응… 으흣.”
미치도록 흥분되면서 자꾸만 허리가 내달렸다. 마주 보며 깊이 교합한 채 허리를 들썩였다.
“하앗… 으… 으읏.”
신음과 질퍽이는 소리 사이로 빗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나는 숨을 헐떡헐떡 내쉬며 달아오른 젖꼭지를 지헌의 몸에 밀착시킨 채 허리를 흔들었다. 온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성욕이 들끓었다.
“빨리… 빨리….”
신호탄처럼 짓물러진 다리 사이로 지헌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내 몸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거칠게 허리를 쳐올려 순간적인 결합을 더욱 깊이 했다.
흔들리는 시야로 징징 울리는 휴대 전화가 보였다. 여자의 직감으로 지헌의 맞선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인도 촉이 있어서 불안한 마음에 끊임없이 전화하는 것 같았다.
지헌은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전화가 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에 안 찬 듯 나를 바닥으로 쓰러트리고 다리를 넓게 벌려 퍽퍽 위에서 강하게 내려쳤다.
지헌에게 양쪽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저 바닥에서 흐느적거리며 굵은 것이 입구를 벌리며 난폭하게 꿰뚫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폭력적인 움직임도 황홀했다. 내 속 어디에 이런 감정이 있나 싶게 온몸이 성욕으로 들끓어 참을 수 없었다. 관계 내내 책상 위 휴대 전화는 울려 댔다. 여자를 버려두고 지헌은 잡아먹을 것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유치하게 그런 거로 우월감과 희열감을 느꼈다.
나는 지헌의 머리를 껴안으며 '이 남자는 내 거야 내 거,'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후끈한 열기가 사라진 공간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지헌은 나를 외면한 채 굳은 얼굴로 와이셔츠 단추를 채웠다. 뒤늦게 차리는 체면치레가 우습기만 하다….
“장난 아니다.”
나는 일부러 정액이 흐르는 다리 사이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의자 위에서 시작된 관계는 책상으로 이어졌고, 손 하나 까닥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쓰러진 나를 소파에 눕혀 놓고 지헌은 온몸을 핥고 빨아 댔다. 그러다 또 혼자 흥분해서 허벅지에 대고 자위하더니 내 다리 사이에 울컥울컥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싸 재꼈다.
그리고 저렇게 모른 척 시치미였다.
“너무하네. 볼일 다 끝났다 이건가.”
다리 사이를 닦은 물티슈를 턱 바닥에 던지며 투덜거렸다. 그 말에 지헌이 흘끔 쳐다보았다.
다리 안쪽 허벅지와 손목 가슴 등 몸 곳곳 하얀 살결 위로 발갛게 흔적이 남았다.
다리 사이는 무르익은 석류처럼 벌겋게 부어서 흐물거렸고, 그 사이로 정액이 흘러내렸다.
나는 엉망진창인 몸을 가릴 생각도 않고 내보였다.
“…….”
지헌은 무겁게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나는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지헌은 처음 성에 눈뜬 10대처럼 눈이 벌게서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사무실 책들은 바닥에 쓰러져 한바탕 몸싸움을 한 듯 엉망이었다.
그런데 볼일 끝났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내외하고 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러고도 지헌의 바지 앞섶은 반쯤 불룩하게 서 있다는 사실이다.
참 정력이 대단하다 싶으면서, 끝끝내 나를 외면한 채 목 끝까지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는 모습이 같잖기도 했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다.'
혀를 차면서 블라우스를 주워 들었다. 그런 내 옆으로 서류 봉투가 툭 떨어졌다. 어느새 말끔하게 차려입은 지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건?”
“갖고 가. 이번 소송 결과 보고 네 연봉이 결정될 거야.”
선을 긋는 듯, 우리 관계를 정의하는 말이었다.
“고작 이런 거로 다리를 벌리다니. 생각해 보면 너도 참 값싼 여자야.”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내게 지헌이 비아냥거렸다.
아직도 예전처럼 나를 바라보는 지헌에게 정신이 아찔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모욕해야 지헌의 마음이 풀릴까.
얼마 남지 않은 인사 평가를 위해 지헌을 이용한다는 오해가 참담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렁그렁 찬 눈물이 툭툭 책상 위로 떨어져 동그랗게 자국이 남았다.
지헌의 말에는 한마디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승아 언니의 독설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헌의 모욕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참담한 심정을, 마음이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을 지헌은 더 오래 겪었을 테니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지헌이 폭발하기 직전의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다.
“너 원하는 대로 됐는데 왜 울어.”
“…….”
“예전처럼 네 마음대로 사람 다 휘둘러 놓고 도대체 왜 울어!”
지헌은 눈물범벅인 나를 보고 거칠게 소리쳤다.
“나는….”
첫마디를 떼다가 목이 메어 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목구멍이 꽉 조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서러움이 몰려와 눈이 시큰거렸다.
울컥 넘어오는 덩어리를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고 싶었어. 살아남고 싶었어. 나는 그냥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남고 싶었다. 가족도 버리고 내게 마음이 있는 지헌을 이용해서 악착같이 살아남고 싶었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지헌도 속이고 나도 속이면서, 우린 서로 몸만 주고받는 관계라고 합리화했다.
아닌 거 알면 진작에 멈췄어야 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미 예전에 박차고 나온 자리인데, 나는 진작에 지헌에게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 마음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내가 1순위가 아닌 정지헌은 이상했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이 무슨 의미인지 들여다보기도 두려웠다.
“나도 이만 가 볼게.”
도망치듯이 딱딱한 얼굴로 돌아설 때였다.
“너희는 볼 때마다 분위기가 좋다?”
빈정거리는 지헌의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들었다.
“뭐?”
귀를 의심하며 박선호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설마 지금… 쟤랑 나 말하는 거야?”
“쟤? 말이 편하네.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지셨나.”
이상한 포인트에서 걸고넘어지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너 눈이 삐었어? 누구랑 누굴 갖다 붙이는 거야.”
대뜸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람들이 안 볼 때마다 도끼눈 뜨고 뒤에서 갈구는 통에 안 그래도 없는 인내심을 동원해 꾹꾹 눌러 참고 있는데, 어디를 봐서 박선호하고 분위기가 좋다는 건지. 같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의 절친한 친구에게 견제당하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 거다.
“쟤 나 볼 때마다 갈구는 거 안 보여?”
지헌은 쟤, 쟤, 거리는 말이 어지간히 귀에 거슬린 듯 서늘한 표정을 풀지 못하더니, 이어지는 내 말에 미간을 확 구겼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둘이서 뭐 있는 거 아냐? 유별나게 사이가 좋은 건 너희잖아.”
“뭐?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헌은 구정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팍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빈정거렸다.
“너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다가 홱 등을 돌렸다.
자꾸 헛소리나 하는 지헌에게 짜증이 났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삐끗하고 말이 튀어 나가는 나에게도 화가 났다.
이후 시간은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헌에게 첨삭받은 조서를 작성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어쩐지 대학 때로 돌아간 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때도 지헌은 내게 무리한 목표를 제시했고 나는 그걸 달성하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시간이 흘러도 어긋나고 같은 역할로만 마주 보는 관계. 거기에 일종의 무력감도 느껴졌다.
우리는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우울했다.
저녁은 간단히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퇴근 무렵이라 엘리베이터 앞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발걸음이 저절로 비상구로 향했다.
박선호를 만나면 피곤하기도 하고, 오래전 일이지만 워낙 학교에서 떠들썩했던 사건이라 혹시 기억하고 있는 지인을 만날까 일말의 두려움도 있었다. 어쨌든 그 사건은 나에게도 상처로 남아 있다.
계단 중간쯤 올라갈 때, 위층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돈 보내 드린 건 받으셨죠?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 가세요. 저 그 정도 해 드릴 여유는 있어요. 저 이제 들어가 봐야 돼요. 네, 또 전화할게요.”
통화를 끝낸 여자는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통화로도 대강의 사정이 짐작되었다. 이어서 쾅,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나는 잠시 서 있다가 마저 계단을 올라갔다.
데스크 앞에 선 여자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여자를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여자는 가방을 챙기다가 무심코 나를 발견하고 애매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에요.”
고개를 젓고 여자를 지나쳤다.
혹시 정지헌은 형편이 어려운 여자에게만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건가. 불쑥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쩐지 대학 때도 이상할 정도로 호구처럼 잘해 준다 싶더니.
Rrr.
지헌의 내선 번호였다. 너무 빨리 받아서 나의 조급증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않게. 정확히 네 번 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예전에는 아무 의식 없이 하던 사소한 행동들도 지금은 상대를 의식하면서 계산적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이러든 저러든 지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게 사람을 초라하게 했다.
“여보세요?”
“조서 끝났으면 들고 와.”
지헌은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꺼냈다. 시계를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새워도 어려울 것 같은데.”
“야근할 거지?”
“그래야지.”
“그럼 와서 초밥 가져가.”
“뭐?”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냐.”
“…….”
“먹었어?”
“…아니.”
책상 위에 있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샌드위치를 바라보았다.
“안 먹었어.”
대답하면서 샌드위치를 집어 발밑 쓰레기통에 툭 던졌다.
일하는 도중인지 수화기 너머 차락, 하고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수화기를 바꿔 들어서 감이 조금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저녁 안 먹었으면 와서 초밥 가져가. 사무장님이 사 오셨어. 또 군것질로 때우지 말고.”
“밥 먹고 더 열심히 야근하라는 거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습관처럼 재킷을 입다가 다시 벗고, 사무실을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거울 앞에 섰다.
문득 지헌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 스타일을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지헌이 머리 묶어 달라고 하면 풀고 바지 입으라고 하면 치마 입고 청개구리처럼 굴었지만, 나중에는 지헌이 일부러 반대로 말하며 나를 조종한다는 걸 깨달았다. 알면서도 속아 주었다.
묶은 머리카락을 풀고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내렸다. 종일 일하느라 구겨진 옷도 신경 쓰여서 손으로 최대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똑똑.
복도를 지나 지헌의 사무실을 두드리자 대답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지헌은 휴대 전화를 한쪽 어깨에 끼운 채 통화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마호가니 탁자 위에는 일식집 이름이 적힌 쇼핑백이 있었다. 대학 때 지헌과 즐겨 먹던 가게였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지헌과 헤어지고 오히려 나는 묘한 죄책감에 같이 찾던 음식점을 한 번도 못 갔는데 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갔구나, 싶어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저희 쪽에서 검토해 본 바로는 소송 없이 가처분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지헌은 통화하면서 서류 더미로 어수선한 책상을 뒤적였다.
막 외출하려는 모양인지 새로 손본 듯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단장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 박선호가 내 앞에서 들으란 듯이 의원 따님 약속 운운한 말이 떠올랐다.
“어디 가?”
전화를 끊은 지헌에게 넌지시 물었다.
“일찍 퇴근하네. 어디 모임 있나 봐?”
슬쩍 떠보는 질문에도 묵묵부답이다.
지헌은 말없이 재킷을 걸쳐 입고 창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커프스단추를 채웠다. 이어서 타이 매듭을 조이고 쭉 서 있는 핏이 꽤 멋있었다. 예전에도 잘생겼다는 건 알았지만 세월의 무게감이 더해져서 분위기가 근사했다.
그런데 살짝 마른 듯 날카로운 옆모습이 내 눈에는 왜 쓸쓸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고집스레 나를 외면하는 시선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 봤자 나보다 백 배는 더 잘사는 놈인데.
예전에 호구 같은 지헌이 하도 답답해서 나는 내버려 두고 네 인생이나 챙기라고 하면, 지헌은 너만 속 안 썩이면 난 걱정할 일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치열했던 시절, 지헌은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을 내게 주었다. 헤어지고 가끔 그게 그리울 때가 있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그대로 더 있다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다. 들고 왔던 서류를 내밀었다.
“토지 보상 관련 판례 말인데 법원에 제출해도 될까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서….”
“나중에.”
지헌은 말을 끊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지헌의 앞길을 막았다.
“지금 알려 줘.”
“…….”
지헌은 고집부리는 나를 일별하고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그러곤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대로 지헌을 보내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느낌. 알 수 없는 절박감이 등 뒤에서 나를 떠밀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우뚝 멈춰 선 지헌은 무슨 짓이냐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호기롭게 막아서긴 했는데 머릿속이 하얬다.
“…….”
지헌을 노려보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내 손은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톡, 톡. 단추가 풀리고 부풀어 오른 가슴 둔덕과 하얀색 레이스가 노출되었다.
“하.”
지헌의 어처구니없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헌보다 더 놀란 사람이 바로 나였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고, 속으로 황망한 비명을 질렀다.
그 어설픈 쇼를 지헌은 감흥 없는 얼굴로 감상했다. 차가운 시선에, 동요 없는 얼굴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
사람이 이렇게 바닥을 드러내는구나. 유치하고 얕은 수였다. 그래도 속아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라도 지헌의 마음을 내게 돌리고 싶었다. 몸은 잘 맞는 편이니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서로 어리석었지만 지금 시작하면 다른 결론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나 좋을 대로 대책 없이 생각했다.
그런데 지헌의 서늘한 얼굴을 마주하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객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엎어 버린 물을 도로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싸구려 감상을 마치고 지헌이 물었다. 내가 나한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너 지금 어쩌자고 이러는 거니. 사무실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내가 제정신인가 싶다.
다른 여자 만나러 가는 지헌을 보면서 내가 배신감을 느낄 자격이 있을까.
내가 지헌을 어떻게 버렸는데. 정지헌 가슴에 어떻게 칼을 꽂았는데.
소개팅 나가는 지헌을 보는데 머리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마음이 참담했다. 지금 와서 정지헌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내가 정상인가 아닌가, 그 판단조차 흐려질 지경이다.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답을 구하듯 지헌을 보았다.
지헌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나를 보더니 책상으로 걸어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툭툭, 손목의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쭉 빼 당겼다. 그 거침없는 동작이 사람을 긴장시켰다.
몸을 날리던 아까의 객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 미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지헌은 고개를 돌려 눈빛으로 나를 낚아챘다.
나는 지헌을 경계하며 등 뒤로 손잡이를 더듬어 퇴로를 확보했다. 민낯을 보일 때의 정지헌은 항상 위험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생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왜, 도망가게?”
시계를 툭, 책상 위에 던지며 지헌이 비웃었다. 강압적으로 나를 어쩌려는 건 아닌 듯했다. 해칠 의도가 없다는 듯 느긋이 의자에 앉아서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 정도는 제압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나는 우리 사이의 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소파를 방패 삼아 지헌을 경계하듯 쳐다보았다.
“나랑 놀자며?”
지헌이 비스듬히 웃었다. 뭔가 속내를 알 수 없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미소였고,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라는 머릿속 명령과 달리 다리는 주춤주춤 지헌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잔뜩 경계하면서 다가서는 내 모습에 지헌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웃는 것도 사악해 보였다. 어쩐지 알면서 속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나갈 용기도 없으면서.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고, 다리를 꼬고 앉은 지헌의 구두 끝이 스커트 자락에 닿았다.
“더 벗어 봐, 어디.”
“여기서?”
“그래. 여기서.”
지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
고민은 짧았다. 치마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툭, 하고 바닥에 치마가 떨어져 웅덩이지자 옆으로 한 걸음 벗어났다.
크림색 블라우스 아래로 얇은 검은색 스타킹 밴드 라인이 아슬하게 드러났다.
이어서 허리를 굽혀 팬티스타킹을 벗어 내리고 블라우스를 벗어 치마 위로 던졌다.
아래에서 받쳐 주는 브래지어 덕분에 탐스럽게 솟아오른 젖무덤은 눈부시게 하얬다.
“마지막은 네가 벗길래, 내가 벗을까. ”
지헌을 보았다.
“계속해.”
지헌이 명령했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브래지어 호크를 풀고 허리를 굽혀 팬티를 끌어 내렸다. 아래로 출렁이는 가슴에 지헌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아침까지 회의하고, 의뢰인과 직원들이 들락거리는 사무적인 공간에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은 이상했다. 공간 자체가 사람을 긴장시키고 야릇하게 만들었다. 별다른 애무 없이 사람을 달아오르게 했다.
항상 지헌을 미친놈이라고 욕했는데 정말 미친 건 나인 것 같았다.
지헌의 시선은 부드러우면서 탄력 있게 솟아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그 아래 타원형으로 퍼진 골반을 차례로 훑어 내렸다. 그 시선에 숨이 가쁘고 몸 안에 열기가 고인다.
지헌은 눈빛을 내게 박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내게 어떠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큼직한 손아귀에 굵직하게 일어선 성기를 쥐고 느릿느릿 쓰다듬을 뿐이었다.
나를 보며 흥분하는 지헌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지헌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내 알몸을 끈덕지게 핥듯이 보았다. 갖고 싶어 안달 난 시선. 그게 나를 충동질했다.
“…….”
나는 홀린 듯 지헌의 앞으로 걸어가 다리 사이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그러곤 눈을 감고 입을 벌려 지헌의 성기를 머금었다.
완전한 나의 패배였다. 또다시 인생이 꼬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내가 대책도 없고 답도 없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오래전 지헌과 같이 밤을 보낼 때, 그리고 가출 후 지헌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처럼 나는 가끔 막다른 길에 몰리면 충동적으로 전혀 엉뚱한 패를 집어 들었다. 될 대로 돼라, 자신을 놔 버리는 것이다.
지헌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했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헌의 성기는 내 기억보다 훨씬 더 크고 굵고 단단했다. 기다란 성기를 끈적하게 핥아 올리고 그 끝을 입에 물고 빨았다. 성기는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혀로 갈라진 끝을 질척하게 문지르자 끈적한 액체가 스며 나왔다.
그런데 체취가 전혀 역하지 않았다. 냄새가 역하지 않으면 운명의 상대라던가, 누군가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참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처음 지헌과 밤을 보낼 때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별안간 지헌의 손이 내 뒤통수를 콱 틀어잡고 가랑이 사이로 바짝 밀어붙였다.
“으읏… 읍.”
순간 목구멍 깊숙이 밀려드는 살 기둥에 지헌의 다리를 붙잡으며 목뒤에 힘을 주었다. 지헌은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약간 여유를 두며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네가 자진해서 내 좆을 다 물고.”
구역질이 올라와 빨개진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바짝 세운 성기가 젖은 점막을 문지르며 입 안을 헤집었다. 부풀어 오른 성기는 더욱 크게 펄떡거렸다.
양아치 같은 새끼.
입 안 가득 들어온 살덩이 때문에 입 밖에 내뱉진 못했다. 대신 지헌의 허벅지를 꽉 아프도록 꼬집었다. 거기에 자극받은 듯 지헌의 하체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후으.”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쾌락에 빠져드는 모습이 꽤 섹시했다. 내 목덜미를 움켜잡은 손에도 푸릇한 힘줄이 돋았다.
냉철한 변호사의 가면을 벗은 지헌의 민낯이었다. 사람들 앞에서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 그게 나를 고무시켰다.
혀로 지헌의 성기를 질척하게 문지르고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끝을 강하게 빨았다.
머리를 움켜쥔 지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소리도 더욱 거칠어졌다. 지헌은 사정할 기세로 허리를 크게 들썩이더니 팟, 하고 걸쭉한 정액을 내 입에 토해 냈다.
“컥… 흡.”
울컥 밀려 들어오는 정액을 바닥에 뱉었다.
“하아… 하아.”
벌어진 입으로 가쁜 숨과 끈적이는 점액질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지헌이 왜 내 입 속에 성기를 쑤셔 넣었는지 잘 알고 있다. 예전에는 굴욕적인 느낌에 자주 해 주지 않은 체위였다.
그나마 지헌과 동거하면서 아쉬운 게 있을 때만 마지못해 하는 흉내만 낼 뿐이었다.
지헌은 일부러 내 기를 꺾고 내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내 입에 성기를 쑤셔 넣은 것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 받아 주었다.
“…….”
거친 숨을 헐떡이며 붉게 젖은 눈으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턱을 지나 우윳빛 가슴 위로 점액질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거기에 끌리듯 지헌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내 턱을 틀어쥐고 단단한 시선과 마주했다.
“…….”
지헌의 눈빛에는 동정과 의미를 알 수 없는 회한이 스쳐 갔다.
“예전에 네가 나한테 이랬으면 난 네 발이라도 핥았을 거야. 너에게 영혼이라도 갖다 바쳤겠지. 그때 내가 원하는 건 너 하나였거든. 오직 너 하나만 갖고 싶었어. 살면서 그렇게 무언가를 염원해 본 적이 없었어.”
지헌의 고해 성사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근데, 지금은 다 시시하다.”
“…….”
“네가 정말 불쌍해 보여. 이제 진짜 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하얗게 질려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지헌은 온갖 번민이 가라앉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급히 지헌의 옷자락을 잡았다.
“…….”
우뚝 멈춰 선 지헌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시선에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움켜쥔 옷자락을 놓았다.
지헌은 책상에서 서류를 들어 툭, 내 앞에 던졌다. 지헌이 작성한 변론 조서였다.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지헌을 보았다.
지헌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많이 익숙했다. 대학 때 나는 늘 저렇게 심란하고 복잡한 눈으로 지헌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겠다. 저런 눈빛이 얼마나 사람을 서운하고 참담하고 초라하게 하는지.
“나는….”
천천히 쉰 목소리로 말문을 여는데 지헌이 내 말을 막았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너도 더는 애쓰지 마.”
그러곤 뚜벅뚜벅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홀가분하게.
***
“언제까지 보내라고 할까요?”
“…….”
“익산 토지 보상 사건, 마을 주민들 진술서요. 언제까지 보내라고 할까요?”
데스크 비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대답했다.
“…서면 경위서 보낼 때 같이 보내라고 하세요.”
“네.”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아 참, 변호사님 이것 좀 드세요.”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는 먹기 좋게 개별 포장된 파이와 마카롱이 들어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나면 가끔 감사의 의미로 선물이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클라이언트가 보낸 선물이겠거니 하고 상자를 건네받는데 비서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정지헌 변호사님께 들어온 거예요.”
나는 멈칫해서 되물었다.
“클라이언트가요?”
“아뇨. 클라이언트는 아닌 것 같은데요.”
비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른 자리에 앉은 직원이 끼어들었다.
“정지헌 변호사님 생일이라고 퀵으로 보냈더라고요. 이름 보니까 여자던데, 변호사님하고 만나시는 분이 보낸 거 아닐까요? 안 그래도 아침에 다들 난리가 났어요.”
어쩐지 요새 변호사님이 야근을 안 하시더라, 일찍 퇴근하시던데 만나는 여자분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미지의 여자를 두고 이리저리 추측했다.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상자를 도로 데스크에 내려놓았다.
“전 됐어요. 많이들 드세요.”
정지헌 생일이 가을이었나….
기억도 안 난다. 정지헌 생일은커녕 내 생일도 제대로 챙겨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헌과 헤어진 시기도 이맘때였던 것 같은데, 참 끝내주는 생일 선물을 준 셈이었다.
이렇게 과거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곤혹스럽다.
과거에 나는 인생을 타협해서 산 죄로 호되게 고생했고,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 지금은 내 발목을 잡아서 지헌에게 다가서기 힘들게 했다.
정지헌의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몇 주 전 만남을 끝으로 지헌을 보지 못했다. 비서들 말대로 연애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나도 굳이 만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날 신경 쓰지 않는 지헌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결재받을 조서가 쌓여서 더는 피할 수도 없었다.
“너 어디 가. 정지헌한테 가려고?”
지헌의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선호는 날 보자마자 얼굴을 확 찌푸리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정지헌 옆에만 접근하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데, 이제는 상대할 기운도 없다. 듣는 척도 안 하고 박선호를 피해서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이것 때문에 그래? 이리 줘. 내가 확인할게.”
박선호는 내 앞을 가로막더니 내 손에 든 파일을 득달같이 뺏어 갔다.
나는 지긋지긋한 얼굴로 박선호를 쳐다보았다. 담당 변호사인 정지헌의 사인이 필요한 서류를 자기가 가져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박선호도 서류를 보고 낭패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명 자료였네….”
“적당히 좀 합시다.”
한심하게 쳐다보며 서류를 빼 들었다.
“하여간 지금 말고 나중에 해, 나중에. 지금은 안 돼.”
박선호는 다짜고짜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박선호를 털어 냈다.
“손대지 말죠.”
“나라고 뭐 너하고 사이좋게 얼굴 마주 보고 싶은 줄 알아?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어휴, 내가 말을 말지.”
박선호는 억울해서 펄쩍 뛰다가 뒤쪽을 흘끔거리며 급히 말소리를 낮추었다.
“하여간 지금 말고 다음에 와. 이거 다 너 좋자고 하는 거야.”
어쩐지 안절부절못한 기색으로 나를 멀리 떼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평상시 정지헌을 싸고돌며 나를 구박할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뒤늦게 정지헌의 사무실로 관심을 돌렸다. 사무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박선호는 이제 사색이 된 얼굴로 내 시야를 가렸다.
“아, 뭔데 그래.”
나는 귀찮은 듯 박선호를 밀어내었다. 시선이 마주친 얼굴은 낯이 익었다. 승아 언니였다. 주제도 모르고 반갑게 웃으려다가 멈칫했다.
나를 쳐다보는 승아 언니 시선이 몹시 차가웠다. 박선호는 낭패라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언니가 정지헌 사촌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야, 너 좀 비켜 봐.”
언니는 눈빛으로 나를 낚아채며 거칠게 박선호를 밀어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는데 잘 만났다는 얼굴이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박선호는 작게 중얼거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턱을 치켜든 승아 언니는 내 앞에 섰다. 세월이 흘러도 미모와 특유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대학 때도 든든한 집안과 타고난 성격으로 남자들을 우습게 보며 손끝으로 부리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같이 공부하는 학생 입장에서 격의 없이 우리와 어울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언니가 우리 수준에 맞춰서 많이 배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아 언니는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뭐, 뺨이라도 내밀어야 하나. 언니는 나와 친분이 있긴 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정지헌 사촌인데 당연히 내게 좋은 감정일 리 없었다.
“왜, 네 발로 차 버린 정지헌 옆자리가 이제는 탐이 나?”
승아 언니는 직설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기어들어 와.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야? 아직도 지헌이한테 뜯어먹을 게 남았어? 인제 와서 아쉬워? 하긴 지헌이만큼 퍼 주고 잘해 주는 사람이 없지?”
“에이. 누나, 그만해요. 지헌이도 이제 만나는 사람 있는데 자꾸 안 좋은 과거 들춰서 뭐 해요.”
박선호가 유들유들하게 끼어들어 승아 언니를 말렸다.
평소에는 정지헌 옆에 접근도 못 하게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면서 그렇게 구박을 해 대더니, 승아 언니한테 된서리 맞으니까 나를 위해 말리는 모습이 그 와중에도 조금 우스웠다.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냐. 지헌이, 너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이야. 너 머리 굴리는 거 지헌이가 모를 줄 알았어? 아니, 걔 알면서도 너한테 퍼 준 거야. 그런 애한테 네가 어떻게 했는데? 인제 와서 뭐 어쩌자고 여길 기어들어 와. 너 정지헌 가질 자격 없어. 보물을 못 알아보고 차 버렸으니까.”
복도를 걸어오던 직원이 심상찮은 분위기에 선뜻 지나가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박선호는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승아 언니 팔을 잡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나, 진짜 그만해요. 지금 이러는 거 지헌이한테도 좋을 거 하나 없어요.”
“하여간 너 이번에도 지헌이 앞길 망치면 너 진짜 내가 가만 안 둬.”
언니는 마지막까지 악담을 퍼붓고 사라졌다. 박선호는 불시에 봉변당한 나를 보며 혀를 쯧 찼다.
“그러게 내가 나중에 오라고 했잖아.”
그러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서 탁탁 털고 내게 내밀었다.
“누나 말 안 좋게 듣지는 마라. 다 이유가 있으니까. 지헌이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연수원도 제때 못 들어가고 전과 생겨서 임용 포기하고 변호사로 빠진 거야. 누나가 말은 좀 심하게 했는데, 솔직히 그때 지헌이 몸 고생, 마음고생 하는 거 옆에서 지켜본 사람 중에 너한테 좋은 감정 가진 사람 하나 없어.”
“연수원을 늦게 들어갔어?”
“몰랐어? 걔 2년 꿇었어. 합격 기수하고 연수원 기수하고 차이 나잖아.”
“합의했다고. 그래서 나는….”
더듬더듬 잇던 말이 잦아들었다. 긴 수술 끝에 다행히 영우가 살아났고, 재판 중 합의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당연히 금방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잊어버렸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과거를 지우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고 싶었다.
“사실 쌍방 폭행이었지만 흉기를 든 지헌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긴 했어. 더구나 상대 쪽 집안도 만만치 않은 집안이라 더 운이 안 좋았지 뭐.”
“…….”
“어차피 다 지난 일 지금 와서 말해 뭐 하냐. 각자 제 갈 길 가면 되는 거지.”
박선호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려다가 망설이는 얼굴로 다시 돌아섰다.
“지헌이 요새 만나는 여자 있어. 이미 집안끼리도 인사 끝났고 곧 약혼한다더라. 너도 알아 두라고.”
툭, 손에 든 서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박선호 앞에서 우스운 꼴 보이면 안 되는데.
“…약혼?”
떨리는 음성과 눈동자에는 충격받은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박선호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얼른 마음 정리해. 이참에 이직해 주면 더 고맙고. 지헌이 결혼식에 네가 가는 것도 웃기잖아.”
아침부터 하늘이 희끄무레하더니 오후가 되면서 툭툭, 무거운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감정 평가서 나왔습니다.”
“나중에 볼게요. 거기 두세요.”
“저, 그리고 이거….”
비서는 내 눈치를 살피며 파일로 된 서류를 쓱 내밀었다. 아까 그 난리 통에 바닥에 흘리고 온 서류였다.
“…….”
기밀이 담긴 소송 서류를 아무나 주워 갈 수 있는 복도에 흘리고 다니다니, 보통 정신 나간 짓이 아니다. 그런데도 별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서류를 건네받았다. 얕은 호기심을 담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행히 신입 직원이 주웠더라고요. 아무도 안 봤어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비서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애써 나를 위로했다.
“그만 나가 보세요.”
비서의 말을 끊고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등 뒤에서 조용히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너 나중에 벌받을 거라고 승아 언니는 악담했지만, 나중까지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대학 때 지헌의 진심을 짓밟은 죄로 나는 지금 두 배, 세 배 벌받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내가 약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 신경 쓰고, 더 기다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대로변은 정차한 차들로 혼잡했고, 우산을 쓴 무리가 우르르 정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책상 위에 있는 감정 평가서와 서류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주말을 앞두고 다들 일찍 퇴근해서 복도는 한산했다.
“야, 대박. 최미희 변호사하고 정지헌 변호사 소식 들었어?”
걸음을 멈칫했다. 살짝 열린 준비실 문틈으로 직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둘이 뭐 있었어?”
“말도 마. 둘이 대학 때 완전 장난 아니었대. 학교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뜨겁게 연애했대.”
“진짜? 어쩐지. 둘이 분위기 이상하더라.”
“이상했어? 난 전혀 모르겠던데. 회의할 때 서로 대화도 잘 안 하잖아. 오히려 박선호 변호사하고 사이 별로지 않아?”
“아니야. 둘이 좀 서로 의식하는 것 같긴 했어.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진다. 대학 때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한테 심심풀이 땅콩처럼 뒷담화 주젯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진짜 오늘 일진 한번 끝내주네.”
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차이고 있었다. 준비실을 지나 내 걸음이 도달한 곳은 정지헌의 사무실이었다.
혹시 내가 정지헌에게 접근해서 지헌이 앞길을 또 망쳐 버릴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무리 때문에 낮에는 쉽게 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안에서 낮은 음성이 돌아왔다.
“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근사하게 차려입은 지헌이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었다.
“감정서 나왔어.”
“거기 둬. 나중에 읽어 볼게.”
지헌은 나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재킷을 걸쳐 입으며 자신의 모습을 창가에 비춰 보았다.
나는 안중에도 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데 온통 신경이 쏠린 모습에 심사가 뒤틀린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문을 잠갔다. 찰칵, 하는 소리에 지헌이 내게 시선을 주었다.
“뭐야?”
“네가 필요해.”
문가에 기대서서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종일 자존심이 무참히 무너졌고, 나에게 무관심한 지헌을 보면서 마음이 또다시 참담하도록 추락했다.
지헌은 창밖에 비가 오는 걸 확인하고 또 병이 도졌다는 얼굴을 했다.
“차라리 정신 병원을 가 보지 그래?”
그러곤 가방을 들고 내 옆을 스쳐 가며 비웃었다. 내 시선은 더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불현듯 독기가 치밀어 오른다.
지헌이 문을 열고 나는 말없이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발신음이 울리기 무섭게 상대방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 변호사님,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전에 승소 턱 낸다고 한 거 지금 괜찮을까요? 별일은요. 비도 오고 따듯한 와인 한잔 어떠세요? 네, 거기 호텔 라운지 괜찮아요.”
나는 온기 없는 눈빛으로 만남을 제안했다. 무시하고 나가려던 지헌은 ‘호텔’이라는 말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전 여기서 출발하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변호사님만 괜찮으시면….”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뚜벅뚜벅 내게 걸어온 지헌은 휴대 전화를 확 뺏어 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미희 씨 사무실 앞으로 갈게요. 한 20분 뒤에 사무실 앞에서.”
휴대 전화 너머 상대방은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었다.
지헌은 입매를 꾹 다물고 보란 듯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는 턱을 치켜들고 오연하게 내뱉었다.
“내가 정신 병원을 왜 가. 네가 있는데.”
지헌의 서슬 퍼런 눈빛이 나를 향한다. 마주 보는 시선에 불꽃이 튀고 나는 보란 듯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
말 없는 기 싸움 끝에 지헌이 거칠게 돌아섰다.
꽉 조인 넥타이를 쭉 빼 당겨 책상 위로 집어 던지고 잘 정리된 머리를 거칠게 헝클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발길을 돌렸는데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나를 외면한 채 숨을 몰아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나는 지헌에게 걸어가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엉덩이 아래 느껴지는 지헌의 성기는 흉흉한 얼굴만큼이나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엉덩이로 꾹 누르자 자극이 심한 듯 지헌의 턱이 움칫했다.
“나 좀 봐 봐. 응?”
고집스레 외면하는 지헌과 억지로 눈을 맞추고 딱딱하게 솟은 부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순간 지헌이 내 손을 낚아채고 날 선 시선을 보냈다.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약한 소리에도 지헌은 흔들림 없이 나를 꿰뚫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랑 뭐 하자는 건데.”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솔직한 마음이었는데 지헌은 가증스럽다는 눈빛이다. 나는 지헌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탄탄한 가슴을 손으로 나긋이 쓰다듬었다.
“진짜라니까.”
“거짓말하지 마.”
“싸우다가 드는 정이 무섭다잖아. 너랑 정들었나 봐.”
애교 섞인 음성에 지헌은 자조적인 어투로 빈정거렸다.
“싸우다 드는 정은 무슨. 떡 치다 드는 정이겠지.”
“…….”
이 새끼가 진짜. 가슴을 쓰다듬는 손이 뚝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삐딱하게 앉은 지헌을 노려보다가 후, 하고 짧게 숨을 내쉬며 지헌의 책장 앞에 섰다.
온갖 법서로 가득한 책장은 전시용이었다. 드르륵 맨 앞의 책장을 옆으로 밀자 뒤에 숨어 있던 진열장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모 기업 인사 팀장부터 온갖 고위층 인사들이 전해 준 고가의 술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 가장 화려한 병을 꺼내 거침없이 뚜껑을 뜯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찌를 듯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나는 입술을 훔치며 지헌을 향해 술병을 들어 보였다.
“술맛 좋은데?”
골프 회원권, 미술품 등등 뇌물은 다양했다. 지헌에게 전해진 뇌물 중 일부는 다시 검찰과 언론 쪽에 로비로 흘러들어 갔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한 모양인데 그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언론에서 추앙받는 변호사가 이런 지저분한 뒷거래를 한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어떨까?”
지헌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건 참을 수 없다. 애정이 아니면 미움이라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오기로 지헌을 자극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일부러 못되게 굴었다.
“적당히 하고 나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헌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 만나는 여자 있다며.”
순식간에 바뀐 화제에 지헌이 삐끗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어처구니가 없고 조금은 곤혹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어떤 여자야?”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말 좀 해 봐. 궁금해서 그래.”
“…….”
“왜, 내가 깽판 칠까 봐? 나도 체면이 있지 안 그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
“듣자 하니 의원 따님이라며? 진짜 결혼할 거야?”
연이은 도발에도 침묵하던 지헌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이제 좋은 집안에서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란 여자 한번 만나 보려고.”
내 가정 환경을 알고 일부러 나를 자극하는 말이었다. 내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라앉았다.
“그래? 네가 과연 무사히 결혼할 수 있을까.”
나는 지헌의 바지 벨트에 손을 가져다 대며 오연히 내뱉었다. 지헌은 냉랭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묵직하게 늘어진 성기를 부여잡아 우묵한 끝부분을 입에 머금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지헌은 내 뜻대로 움직였다. 나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다.
뭉툭한 살덩이는 힘을 받아서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끝부분에선 끈적끈적한 점성이 스며 나왔다. 나는 혀끝으로 갈라진 틈을 문지르며 비벼 댔다.
팽팽하게 발기하는 성기와 달리 지헌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착잡한 얼굴로 비 오는 창밖을 응시했다.
복잡한 지헌의 얼굴에는 욕망에 굴복해 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언뜻 엿보였다. 그런 고뇌하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웠다.
지헌의 성기를 잡고 뜨겁게 박동하는 살덩이를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예전에는 한사코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헌이 나를 가증스럽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춥춥, 하는 소리를 내며 혀로 길게 핥고 빨아 댔다. 사정할 듯 뜨겁게 박동하는 성기가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여서 거지 같은 기분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했다. 나에게 흔들려 무너지는 지헌이 몹시 흡족했다.
“예전엔 비 오는 날이 좋았는데 이젠 싫어. 구질구질한 기억이 떠올라서.”
지헌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몸을 앞으로 수그리며 내 턱을 잡았다. 나는 얼떨결에 입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끈적한 실이 길게 늘어지면서 턱으로 흘러내렸다.
지헌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에 묻은 액체를 쓱 닦아 주었다. 다정한 행동과 달리 이어서 묻는 말은 비수였다.
“너 예전에 나한테 구역질 난다고 했던 거 기억나?”
“…….”
“왜 대답 못 해? 선택적 기억 삭제라도 했어?”
지헌에게 했던 욕은 하도 많아서 기억도 안 난다. 과거 일을 꺼내면 나는 늘 나쁜 년일 수밖에 없었다.
식은 얼굴로 지헌의 손을 탁 치워 내고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지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비아냥거렸다.
“언제 봐도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야.”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지헌의 휴대 전화가 징징 울렸다. 아마도 지헌에게 바람맞은 여자겠지.
지헌이 책상 위로 손을 뻗을 때, 나는 급히 지헌의 목덜미에 손을 둘렀다. 그러곤 지헌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넣어 줘.”
“…….”
지헌은 휴대 전화를 손에 쥔 채 잠시 멈칫했다.
나는 사타구니를 지헌의 허벅지에 대고 앞뒤로 움직이며 허리를 흔들었다. 비죽 튀어나온 정점이 지헌의 옷에 마찰하여 짜릿했다. 허리를 들썩이며 지헌의 어깨를 부여잡고 젖은 신음을 흘렸다.
“으응… 흐읏.”
지헌의 음욕에 찬 시선이 나를 향한다. 지헌은 휴대 전화를 책상 위에 놓고 내 허리를 잡고 위로 올렸다. 그러곤 발갛게 달아오른 다리 사이로 성기를 묵직하게 밀어 넣었다.
좁은 구멍이 억지로 벌어져 그의 성기 형태로 변해 갔다. 지헌은 빠듯한 느낌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파고들었다.
“아… 흐읏. 응, 응.”
몸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헌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능숙하게 안쪽을 문질렀다.
질 안이 허리를 돌리는 그에 의해 넓혀지고 있었다. 뜨거워진 안쪽을 능숙하게 문지르고 느끼는 곳을 찌르듯이 밀어 올렸다.
“으… 응, 으읏.”
음란해진 다리 사이에서는 끈적한 액체가 연신 흘러내렸다. 물에 젖은 비누처럼 미끈거리는 다리 사이로 발기한 기둥은 가차 없이 파고들어 쐐기처럼 몸 안 깊숙이 박혔다. 뿌리까지 삼켜질 정도로 빈틈없는 결합이었다. 그러곤 민감해진 속살을 긁으며 다시 빠져나갔다.
“으응… 으흣.”
미치도록 흥분되면서 자꾸만 허리가 내달렸다. 마주 보며 깊이 교합한 채 허리를 들썩였다.
“하앗… 으… 으읏.”
신음과 질퍽이는 소리 사이로 빗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나는 숨을 헐떡헐떡 내쉬며 달아오른 젖꼭지를 지헌의 몸에 밀착시킨 채 허리를 흔들었다. 온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성욕이 들끓었다.
“빨리… 빨리….”
신호탄처럼 짓물러진 다리 사이로 지헌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내 몸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거칠게 허리를 쳐올려 순간적인 결합을 더욱 깊이 했다.
흔들리는 시야로 징징 울리는 휴대 전화가 보였다. 여자의 직감으로 지헌의 맞선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인도 촉이 있어서 불안한 마음에 끊임없이 전화하는 것 같았다.
지헌은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전화가 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에 안 찬 듯 나를 바닥으로 쓰러트리고 다리를 넓게 벌려 퍽퍽 위에서 강하게 내려쳤다.
지헌에게 양쪽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저 바닥에서 흐느적거리며 굵은 것이 입구를 벌리며 난폭하게 꿰뚫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폭력적인 움직임도 황홀했다. 내 속 어디에 이런 감정이 있나 싶게 온몸이 성욕으로 들끓어 참을 수 없었다. 관계 내내 책상 위 휴대 전화는 울려 댔다. 여자를 버려두고 지헌은 잡아먹을 것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유치하게 그런 거로 우월감과 희열감을 느꼈다.
나는 지헌의 머리를 껴안으며 '이 남자는 내 거야 내 거,'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후끈한 열기가 사라진 공간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지헌은 나를 외면한 채 굳은 얼굴로 와이셔츠 단추를 채웠다. 뒤늦게 차리는 체면치레가 우습기만 하다….
“장난 아니다.”
나는 일부러 정액이 흐르는 다리 사이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의자 위에서 시작된 관계는 책상으로 이어졌고, 손 하나 까닥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쓰러진 나를 소파에 눕혀 놓고 지헌은 온몸을 핥고 빨아 댔다. 그러다 또 혼자 흥분해서 허벅지에 대고 자위하더니 내 다리 사이에 울컥울컥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싸 재꼈다.
그리고 저렇게 모른 척 시치미였다.
“너무하네. 볼일 다 끝났다 이건가.”
다리 사이를 닦은 물티슈를 턱 바닥에 던지며 투덜거렸다. 그 말에 지헌이 흘끔 쳐다보았다.
다리 안쪽 허벅지와 손목 가슴 등 몸 곳곳 하얀 살결 위로 발갛게 흔적이 남았다.
다리 사이는 무르익은 석류처럼 벌겋게 부어서 흐물거렸고, 그 사이로 정액이 흘러내렸다.
나는 엉망진창인 몸을 가릴 생각도 않고 내보였다.
“…….”
지헌은 무겁게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나는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지헌은 처음 성에 눈뜬 10대처럼 눈이 벌게서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사무실 책들은 바닥에 쓰러져 한바탕 몸싸움을 한 듯 엉망이었다.
그런데 볼일 끝났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내외하고 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러고도 지헌의 바지 앞섶은 반쯤 불룩하게 서 있다는 사실이다.
참 정력이 대단하다 싶으면서, 끝끝내 나를 외면한 채 목 끝까지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는 모습이 같잖기도 했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다.'
혀를 차면서 블라우스를 주워 들었다. 그런 내 옆으로 서류 봉투가 툭 떨어졌다. 어느새 말끔하게 차려입은 지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건?”
“갖고 가. 이번 소송 결과 보고 네 연봉이 결정될 거야.”
선을 긋는 듯, 우리 관계를 정의하는 말이었다.
“고작 이런 거로 다리를 벌리다니. 생각해 보면 너도 참 값싼 여자야.”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내게 지헌이 비아냥거렸다.
아직도 예전처럼 나를 바라보는 지헌에게 정신이 아찔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모욕해야 지헌의 마음이 풀릴까.
얼마 남지 않은 인사 평가를 위해 지헌을 이용한다는 오해가 참담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렁그렁 찬 눈물이 툭툭 책상 위로 떨어져 동그랗게 자국이 남았다.
지헌의 말에는 한마디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승아 언니의 독설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헌의 모욕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참담한 심정을, 마음이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을 지헌은 더 오래 겪었을 테니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지헌이 폭발하기 직전의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다.
“너 원하는 대로 됐는데 왜 울어.”
“…….”
“예전처럼 네 마음대로 사람 다 휘둘러 놓고 도대체 왜 울어!”
지헌은 눈물범벅인 나를 보고 거칠게 소리쳤다.
“나는….”
첫마디를 떼다가 목이 메어 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목구멍이 꽉 조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서러움이 몰려와 눈이 시큰거렸다.
울컥 넘어오는 덩어리를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고 싶었어. 살아남고 싶었어. 나는 그냥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남고 싶었다. 가족도 버리고 내게 마음이 있는 지헌을 이용해서 악착같이 살아남고 싶었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지헌도 속이고 나도 속이면서, 우린 서로 몸만 주고받는 관계라고 합리화했다.
아닌 거 알면 진작에 멈췄어야 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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